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야상 안쪽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카테고리 없음 2025. 12. 18. 05:38


     

    퇴마사 시노노메 타쿠미. 위와 같은 유언장으로 사망을 부고합니다.

    유언장과 함께 이 편지는 제 사후에 전달될 것이며, 불의의 사고로 편지가 유실될 경우 본가의 주소로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과 감정을 목도하는 직업을 지닌 만큼, 죽음이 가지는 무게를 압니다. 어디까지나 자율성에 맡겨야 하는 것을 아나, 족적으로 남기는 것이 그럴듯한 끝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고민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선뭉치가 보인다.) 정돈된 말로 편지를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스물일곱의 해를 거치며 유서도 세 번째 갱신하고, 협회에 올릴 보고서를 수도 없이 작성했는데도 어렵기만 해.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영영 어른이 되지는 못할 운명인가 봐. 그래도 괜찮겠지. 같이 있을 적에는 그 시절로 돌아가도 나를 나무랄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 너희들 이야기하는 거 맞아. 아마 이 편지는 쿠온자키 고교 동급생 중 한 명의 손에 들릴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의뢰를 받자마자 유언장을 갱신하고, 편지를 다시 쓰고 있어. 이전까지 썼던 편지는 딱딱하고 어려운… 공식적인 말을 쓰려고 노력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편하네.

     

    믿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죽음이 두려워. 1차 백귀야행 때 일주일이 훌쩍 지난 후에 눈을 떴을 때 혼란스럽더라. 팔은 이상하고, 머리도 아프고, 몸에는 힘도 안 들어가고. 유우미가 정말 많이 울었어. 부모님의 죽음 이후로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봤는데, 그게 내가 없는 사이에 쌓여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덜컥 겁이 났어. 죽음이라는 건 이런 공백이 생기는 일이구나.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없어. 퇴마사라고 한들 무로 돌아갈 뿐이야…. 그게 무서웠던 것 같아. 그래서 부끄럽게도 백귀야행이 끝나고 도망쳤어. 유우미를 핑계 삼아서, 내가. 죽고 싶지 않아서. 아수라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너희라면 그럴 수 있다고 얘기해주겠지. 떠오르는 목소리가 많네.

     

    어부로 사는 삶은 평온했지만… 내내 파도 소리에 속이 시끄러웠어. 잘못된 일이 아니란 걸 알아.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산다는 것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된다면 어느 곳이 배가 되고 땅이 될 수 있을까. 폭풍우는 멈추지 않고, 갈 길을 잃어 표류하며 살겠지. 그런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 흘려보내며 살아야 하는데 속이 너무 꽉 막혔잖아. 답답하게 살아가는 바다 사람이 어딨어. 사람이 태생에 맞게 살아야지. 어울리는 삶을 살래. 그 말이 좋았어.

     

    내가 느낀 두려움을 너희들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원 생환이란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걸 알아.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고, 내가 봐온 것이 있으니까 누군가를 잃을 각오도 충분히 했어.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너희들이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 번 다시 없었으면 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나는 그걸 위해,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의뢰를 받은 거야. 그러니 살아남았다면 내 두려움에 좌절하지 말고, 두려움을 알면서도 걸음하게 했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는 생각에 기뻐해 줘. 의뢰가 무사히 끝난 후에는 다 같이 웃으면서 사진 한 장 찍고, 그걸 바다에 띄워주지 않을래. 사진도 싫고 웃기도 힘들면 그냥 식사 한 끼 하고 헤어져 주라. 그걸로도 충분해. 정 없게 살지 말고. 바빠도 열심히 시간 내서 얼굴 보고 살아. 나는 의뢰만 끝난다면 그러고 싶었으니까. 아마, 아주 오래도록. 진심으로 너희와 함께하고 싶었을 거야. 내 평생과도 같았던 동생을 달래지 못하고 걸음 했던 것처럼.

     

    슬퍼해도 돼. 잊지 않고 기억해도 좋아. 욕을 해도 되고, 힘들면 다 망각하고 절연해도 괜찮아.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말란 소리야. 그거, 흘려보내는데 어떤 도움도 안 되거든. 유경험자라서 하는 소리야. 그러니 충분히 슬퍼한 후에 인사해 줘.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게. 그 후에는 종종 떠올리면서 즐겁게 살길 바라.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고. 그게 안 됐으면 난 부모님을 잃은 후로는 웃으면서 살면 안 됐어. 참고로… 농담이다? 너희랑 있을 때마다 엄청 즐거웠으니까.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바다야. 안전하고 즐거운 파도가 아니라도 버텨 살아내겠다고 생각해 낸 귀한 바다고, 파도니까. 살면서 문득 외로워질 적에는 나라는 사람이 너라는 바다를 사랑했다는 걸 기억해. 내가 한평생 옆에 두고 살아도 질리지 않는 나의 고향이었다고.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뭐든 강요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러면 시간이 난 김에 조금 더 말을 덧붙여보도록 할까. 이곳에 오지 못한 친구가 있으면 대신 전해줘. 부탁할게.

     


     

    리온, 네 일을 알면서도 끝까지 남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나바야시와 서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어. 그래야 믿을 수 있을 거 아니야. 너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늦은 적이 없다고. 그런데 적어도 나로서는 증명할 수 없게 됐네…. 하지만 친구들이 끊임없이 네게 증명해 주겠지. 그래서 언젠가 정말로 괜찮아졌을 때, 그때 네 이야기 또한 기록해서 남겨줘.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태어났을 때 너의 기록을 보고 이름 모를 감정을 느끼며 안심할 수 있게. ...그리고 너무 늦게 자지 말고, 혼자 무리하지 말고. 애들 챙기는 것도 좋은데 네 몸도 챙겨야 돼. 춥지 않다고 너무 얇게 입고 다니지 말고…. 음. 생각해 봤는데 나는 누군가의 오빠가 될만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게 좋았어, 내 또 다른 동생.

     

    치나츠 상, 내 배는 언제 고쳐주러 올 거야?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데 실력이 영 시원찮아. 내 생각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고쳐줘야 할 것 같아. 친구끼리는 그런 거 다 해준다고 했잖아. 의뢰비는 어떤 걸로 가져가도 상관없으니까… 일 끝난 이후에 우리 동네 와서 배 한 번만 보고 가줘. 우리 이모한테 드릴 건데, 아무래도 이제 나이가 좀 있으셔서 걱정되거든. 대신 내 이름 이야기하면서 친구라고 하면 부족하지 않게 챙겨주실 거야. 돈은 아니고… 마음이라거나, 밥이라거나, 그리고 포옹까지. 꽤 괜찮은 조건이지? 아니더라도 친구와의 의리로 한 번은 넘어가 주라. 네가 대학 다닐 때 한 번쯤은 학교로 놀러 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네. 다음에는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을 같이 다닐 수도 있을까? 네가 대학을 안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바라볼까 해.

     

    유키 상, 결국 스키 타는 법 안 알려줬지. 알려준다고 해서 엄청 기대했단 말이야. 물론 네 사정이 있다는 거 알아. 다들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참 정이 많잖아. 마음은 나누어주는 법이라, 그게 떠나거나 할까 봐 그래서 그런 식으로 굴었던 거지. 만났을 때 네 모습은 어떨까. 잘 지냈겠지? 아니라면 말은 안 해도 엄청 속상했을 텐데…. 연락 안 받아도 괜찮았어. 편지를 보내면 아주 가끔 한 번씩은 답장해 주었잖아. 그걸로 네 마음이 여전하단 걸 알 수 있었거든. 어릴 때 말이야. 내 마음 변하면 저주해도 된다는 말, 그거 진심이었어. 그만큼 자신 있었고… 어때. 봐봐. 여전히 질리지 않고 좋아하고 있지? 이쯤엔 내 진심을 알아주려나. 알게 됐으면 우리 앞으로도 쭉 친구인 거다? 눈 오면 또 큰 눈사람 만들어서 나뭇가지 꽂아 줘. 내가 없어도 다른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아. 모두 너를 아낄 테니까.

     

    나코 상, 나 도쿄에 집 사줄 돈이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약속은 지켰어.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야. 연락이 잘 안돼서 걱정인 친구들이 많은데… 나코 상이랑은 연락도 자주 되고, 계속 얼굴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마음만 같아선 나도 나코 상이 사장인 곳에 들어가서 직원으로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재밌을 것 같잖아. 친구로 시작해서 사장과 직원 관계라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물론 무급으로. 나도 이 정도 센스가 있지. 근데… 그러면 나코 상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챙겨줬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너라서 친구로 남아있고 싶었나 봐. 네가 소중하면서도, 나를 소중히 해줄 사람 같아서. 나를 두고 먼저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 먼저 떠나게 됐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오래 살아. 원하는 만큼 안전하게, 행복하게. 기도할게.

     

    타이가 상, 걱정이네. 이 편지를 쓸 때까지도 루리를 찾지 못했으니까. 나는 루리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고 믿어. 그야 누구 동생인데. 네 동생이 얼마나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마 이 편지가 전달될 즈음이면 둘이 만나지 않았을까 싶네. 나는 네 강함이 부러워. 너는 제대로 지킨 게 없는데 뭐가 강하냐고 하겠지만…. 내 동생도, 이모도, 사랑하는 마을도 효고 현에 있지.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마을도 피해가 컸을 거야. 나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지키지 못하는 거 같거든. 그래서 참 못난 사람이다 싶은데, 너는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니까. 네게 많이 배우고 싶었어. 얼마나 잔소리를 들어도 좋으니까… 그러니, 언젠가 가르쳐줄래? 내게 귀한 것을 지키는 법을. 그땐 얌전한 학생이 되어볼게.

     

    세이타로 상, 이 의뢰는…… 왔겠지? 사실 여태까지 무엇 하나 남기지 않은 너니까 오지 않을 확률이 높을 걸 알아. 근데 이상하지. 이유는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이곳에 올 것만 같아. 재회할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이런 걸 영력이라고 하는 걸까….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살았어? 네가 떠나 걸음 한 곳에서 행복했어? 멀리 떠났다면 부디 언제나 평온하고 즐겁게, 네가 선택한 새로운 일상 속에서 원하는 만큼 누리면서 살았으면 해. 이왕이면 자존감도 많이 높이고 말이야. 네가 키운 자존감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이 됐건 무척이나 근사한 모습일 거야. 너는 내가 아는 친구 중에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니까. 할 수 없다는 불확신을 품고도 남아있는 것보다 곧은 용기는 없어. 그러니 부디 네가 조금 더 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까진 아니라도.

     

    마리,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펜 엄청 귀여운 거 알아? 유우미가 두고 간 펜인데 끝에 폭신폭신한 녹색의 털 뭉치가 달려있어. 그걸 보는 순간 널 닮았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지 뭐야. 요새는 미소녀가 아니라 미인이었지? 어쨌든 그거 말이야. 모든 원칙을 지키며 사는 네가 대단한 거 같다 싶으면서도 힘들겠다 싶기도 해. 사람은 어떤 완벽한 모습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 물론 그걸 지키며 살아가는 삶에 긍지가 있다는 건 알아. 네가 쉬이 무너질 사람이 아닌 것도 알고.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널 애정한다는 증거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네가 힘들고 지칠 때, 정해진 원칙에서 벗어날 때 숨 쉴 구석이 되어주고 싶었어. 결국 그러지 못하고 떠나게 되지만… 가끔 힘들 때 바다에 와서 크게 외치고 가. 전부 듣고 있을게. 미인의 말은 경청해야 하는 거잖아.

     

    쇼우 상, 널 보면서 좋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매 순간 배우는 것 같아. 물론 너랑 나는 다른 사람이고, 네가 너무 뛰어나서 나는 발끝도 따라갈 수 없지만… 내가 어디선가 다정하다는 말을 들으면 네 다정을 보고 배웠기 때문일 거야. 항상 곧은 사람인 너는 이번 의뢰에도 왔겠지? 비록 퇴마사 자격증은 얻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네게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다만 네 능력이 퇴마사 안에 갇혀있기엔 너무 아쉬워서 세상이 너를 붙들고 있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잖아. 경찰… 너랑 정말 잘 어울려. 너는 늘 그랬듯이 최선의 노력으로 누구보다 곧게 나아가겠지. 그 길을 항상 응원할게. 참, 살아남았다면 유우미도 한 번쯤 만나러 가줄래? 친구 중에는 네가 가장 믿음직하거든. 부탁할게. 잘 달래 줘. 겸사겸사 고양이도 보고 가고.

     

    시온 상, 얼굴 보고 싶다. 네 얼굴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다시 만나도 못 알아볼까 걱정이야. 너무 많이 변하진 않겠지? 어디 상한 구석도 없어야 할 텐데. 최근에는 내 마음이 시끄러워서 통 연락을 못 했는데… 혹시 아직도 졸업 시험 때 일을 걱정하는 중일까. 그러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아주 만약에, 만약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말이야. 너는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기억해. 너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싫어하더라도 그 마음은 시간 지나 흐려지고 연락이 통 없는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만 남을 거야. 그러니 망설이고 있다면… 괜찮아. 우리에게 돌아와. 그럼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 걸 축하한다고 인사해 줄게. …내가 아닌 친구들이? 이왕이면 직접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는 말인데… 친구로 승격됐던 거 취소하는 건 아니지? 그냥 보류였다고 해줘. 그럼 다시 노력해 볼게.

     

    류사쿠 상, 내가 어쩌다가 전해 들은 게 있는데… 술 그만 마셔! 너 그거 알코올 중독이야. 아니길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해. 다만 지금 네가 사는 방식으로는 절대 행복하지 못할 걸 아니까… 그래서 걱정하는 거야. 쿠온자키 고교 재학 시절에 만났던 너는 행복…이라고 보긴 어려워도 말이야. 네 재능을 자신 있어 하면서 꿋꿋하게 왼손을 쓰던 모습이 참 멋있었어. 나는 너처럼 타협하지 않고 내 의견을 끝까지 고집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처럼은 못할 것 같거든.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너를 확신하고, 꺾이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해도 나아가며 빛날 수 있는 사람. 그러니 네가 다시금 가지고 있던 빛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떠올리게 되면… 이번엔 오른손으로 쓴 부적 한 장 정도 선물해 주지 않을래? 바다 앞에서 날려줘. 분명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카요 상, 네가 그날을 악몽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오래도록 생존자로 남고 싶었어. 우리는 그날에 너무 오래 잡혀있었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그날의 참상이 남아있잖아. 너도, 나도. 서로가 퇴마하다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안해서 뛰쳐나가겠지.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남아버렸네. 나는 그 상흔을 한 획 더 그어버린 꼴일까. 도움이 되기는커녕 못난 동료로 남아서 미안해. 하지만, 나는 정말로, 누구보다… 살고 싶었어. 죽고 싶지 않아. 다 상관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내내 무서웠어. 그래서 몸 사리면서 쉬라던 네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알아? 아마 죽기 직전에 얌전히 이야기 듣고 돌아갈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을 한 번쯤 했을걸. 그래도 후회는 없었을 거야. 나는 평생 이 길을 놓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딱 하나만 더 품고 가줘. 작은 흉터면 충분하니까.

     

    오도리카, 우리 집 자주 놀러 와. 내가 없어도 유우미랑 이모, 그리고 바다는 언제나 널 반길 테니까. 나는 네가 해주는 이야기들이 참 좋아. 듣고 있으면 여러 세계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거든. 걱정 없이 그 순간만큼은 웃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말이야…. 있지, 사실 라쿠고가 아닌 너와 네 이야기를 더 사랑하는 거 같아. 네 친구니까 네가 그리 사랑하는 라쿠고를 더 사랑해야 할 텐데. 이상하고 나쁜 친구지. 하지만… 라쿠고가 시노리 키에카에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세리에 오도리카에게는 있잖아. 그러니… 아주 가끔. 라쿠고를 하다가 네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면 말이야. 우리 집으로 와줄래? 거기서 이야기하면 분명 바람이 내게로 전해줄 거야. 그리고 밖으로 나갔을 때 갑자기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내 답장이라고 생각해 줘. 추신, 이젠 못난 이야기도 편히 해.

     

    오토야, 네 잘못 아니야. 내가 나쁜 거야. 그러니까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그냥… 전부 잊어버려. 내 친구 중에 너무 나쁜 사람이 있었다고.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해도 안 잊을 거지? 나도 너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네. 그럼 이렇게 해볼까. 곧 크리스마스지. 크리스마스 때 다 같이 보여서 파티해 줄래? 우리 가족이랑, 너희 가족이랑 모여서… 트리도 꾸미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줘. 그러다가 내 얘기도 해주고 중간에 다른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그럼 어느 순간 나도 그 사이에 껴서 같이 즐기고 있겠지. 크리스마스는 모두의 축제니까. 그쪽 신도 하루 정도는 망자에게 너그럽게 굴지 않겠어. 그러니 우선… 그때까지 살아가. 그 다음엔 신년을 맞이하고, 봄을 보고, 여름이 오면 바다를 보고…. 마지막엔 내 이름을 불러줘. 그럼 이번엔 내가 네 곁으로 갈게, 네가 외로울 일 없도록. 그러니… 어느 날엔 웃으면서 내 이야기를 해줄래? 잊지 마. 나를 네 추억으로 삼아 줘.

     

    세이지, 이 말은 네게 전해질 수 있을까? 사람은 쉽게 변한다니까 지금의 너는 내가 아는 그 이누시 세이지가 아닐지도 몰라.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근데… 뭘 하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여전할 것만 같아.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고, 불리하면 모른다고 답하고, 칭찬하면 좋아하는 너 말이야. 얼굴 못 보는 거 많이 서운해. 무슨 일인데 연락도 없이 떠났어. 하지만 그것보단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할까 봐 아무 것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앓고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훨씬 크네. 어쩌겠어. 사람은 더 사랑하는 쪽이 진다니까, 그 비슷한 거겠지. 혼자 앓지 마. 종종 바다도 보고, 친구들이랑 시내도 놀러 가고, 봉사도 꾸준히 다니고… 그렇게 살아. 나는 누가 뭐래도 네 편이야. 그것만 기억해. 우리 집에 너한테 가야 할 편지 쌓여있으니까 그거 가져가고. 우리 동네에 쉬러 올 때 내 방 써도 돼. 믿을 만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음엔 더 좋은 사람을 첫 친구로 사귀어. 알겠지? 특별히 봐주는 거야.

     

    켄이치, 하필이면 짐이 무거울 너한테 짐 하나를 더하게 되었네. 퇴마사가 되기로,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최대한 남아있겠다고 약속했는데. 무섭다는 이유로 도망가서, 그날에 혼자 남겨두고 가서 미안해. 나는 내가 강하진 못해도 언제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한심하다고 얘기해도 할 말이 없어. 있지, 도망을 가고 나니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단 걸 알게 됐어. 그리고 거기 혼자 버티고 있을 네가 얼마나 힘들지도. 네 옆에서 함께 지난한 고통을 견디는 동료가 되고 싶었어. 나는 그럴 수 있었을까? 적어도 실망스러운 동료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름을 지어주었던 고양이 기억해? 렌 말이야. 우리는 생에 인연을 남겨두었으니까,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면 한 번쯤은 밖을 들여봐 줘. 색이 검다면 옆에 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에이토 상, 한 번쯤은 네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퇴마사인 너도 좋지만 배우라고 하면 한 번쯤은 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 아니겠어?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왜 그렇게 궁금할까 생각해 봤거든. 네가 내게 보여주는 모습이 연기가 아니라 생각해서 그런가 봐. 온전히 진실된 건 아니더라도, 너도 분명 전부 숨기며 살지 않는다는 거지. 물론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을 포장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네. 나중에 나한테 연기하는 법 알려주지 않을래? 그때 너한테 받은 푸딩값 아직 못 받았으니까. 푸딩값에 연기 교습비까지 쳐서 제대로 갚을게. 꽤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죽은 이후에도 연기가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고. 그러니 다시 만나는 날까지 열심히 고민해 봐. 그때 돼서 알려주기 싫으면… 어쩌지? 이것도 똑똑한 네가 답을 주지 않을까?

     

    츠카사 상, 너라면 내가 죽은 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명확한 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영안도 트이고 마을에서 제를 지내지만 종교에 대한 건 여전히 모르겠더라고. 신의 개념도, 구원도, 구원받기 위한 삶도 말이야.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지냈으니 죽은 이후에 구원받지 못하게 되려나. 네게 부탁해서 이것저것 종교 공부를 많이 할 걸 그랬어.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죄 없이 죽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귀신은 한과 원망이 깊게 남은 사람의 잔재라고 하잖아. 그럼 귀신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그런 거 없이 구원 받아 좋은 곳으로 갔을지… 그게 항상 궁금했거든. 너도 답을 모른다면 됐어, 괜찮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네 이야기를 많이 해줘. 네가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란 건 알지만 내 목소리가 닿지 않을 테니까. 들어줄 거지. 믿고 있을게.

     

    미토 상,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약속 지켰어! 분명 마지막까지 나는 변함없이 널 사랑했을 거야. 그야 지금도 이렇게 네 소식과 안녕을 바라고 있는걸. 어때, 변치 않는 사랑이 존재하고 그걸 받는다는 기분이? 부담스럽지만은 않길 바라. 마음을 돌려받는다면 기쁘겠지만… 그런 것보단 한 번이라도 더 웃어주는 쪽이 좋거든. 너는 뭐든 쉽게 질린다고 했잖아. 그런데… 좋은 소식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우리는 그렇게 남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제대로 연락되는 애도 몇 명 없으면서 무슨 바보 같은 확신이냐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원래 바보 같은 편이고, 이런 건 근거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분명 네 마음에 무게가 남게 될 거야. 우리를 좋아하고, 질리지 못해서 슬퍼할 날도 오겠지. 그치만 그만큼 웃게 될 테니까… 슬픔을 너무 미워하지 마. 슬픔은 또 다른 말로 애정의 증빙이거든.

     


     

    됐다. 어찌저찌 종이 안에 꾹꾹 눌러 담았네. 슬슬 위기였는데 다행이야. 이거보다 더 두꺼우면 안 들어간단 말이지.

     

    이번 생, 너희랑 친구가 되어서 좋았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인연이야.

    그러니… 우리.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자. 우리가 사랑할 것들 앞에서.

     

    그전까지 나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갈게.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졌거든.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내 부모님이 그리우니…….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축하해줘.

    이제는 그곳에서 만나지 못할 너희를 그리워할 거야.

     

    유우미를 잘 부탁해. 강한 아이니까 잠깐만 머물러주면 금방 다시 나아갈 거야. 이모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럼.

    이 편지와 유언장이 전달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시노노메 타쿠미,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태초의 품에 잠기러 갑니다.

    바다가 우리를 축복하길.

     

    추신) 제사상에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올려줘.

Designed by Tistory.